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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진즉 군평(중국 한나라 은둔 선비)일랑 버려두고/높은 벼슬 바라며 한양 달려가지만/나는야 그래도 산중에 하는 이 있을까 봐/바위 위에 나의 이름 새겨 놓지 않았다네.’(왕석보의 시 ‘우연히 읊다’)
이 시는 평소 검소하고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던 천사 왕석보(1816∼1868)가 남긴 칠언절구다.
조선 말 순조 때인 1816년 전남 구례 광의면 천변마을에서 태어난 왕석보는 고려 태조 왕우량주투자카페
건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예의가 바르고 학문에 뛰어나 20살이 되기 전 마을 어른들에게 존중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젊은 시절 한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했는데 응시생들이 청탁에 분주한 모습을 보고 비루하게 여겨 고향으로 돌아와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재물이나 공명에 관한 말은 한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세 아들 봉주 왕사각(1836∼1오로라 주식
895), 소금 왕사천(1842∼1906), 소천 왕사찬(1846∼1912) 또한 뛰어난 학문에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평생 시를 쓰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왕석보 네 부자가 남긴 시를 묶은 ‘개성가고’를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 나왔다.
구례향토문화연구회는 “조선 후기 구례 출신 왕석보와 세 아들 왕사각, 왕사천, 상승주식
왕사찬 네 부자의 한시 291수를 수록해 1913년 간행한 공동 시문집 ‘개성가고’를 최근 국문으로 번역, 출간했다”고 14일 밝혔다.
번역은 구례군과 구례군의회 지원을 받아 박완식 전주대 한문교육과 명예교수가 맡고 박소동 한국고전번역원 명예교수가 해제(설명)를 붙였다. 책 제목 ‘개성가고’는 ‘고려 왕족 후예가 쓴 원고’라는 뜻으로, 1릴게임황금성오션바다
913년 왕사각의 아들 왕수환(1865∼1926)이 책 출간을 맡긴 김택영이 지었다.



1908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자 인재 육성을 위해 왕석보의 후학들이 세운 사립학교인 호양학교.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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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왕석보의 시 23수, 왕사각의 시 36수, 왕사천의 시 12수, 왕사찬의 시 220수를 실었다. 시 12수가 실린 둘째 왕사천은 시집 ‘소금유고’를 남긴 것으로 전해지나 소재는 찾지 못해 그가 남긴 전체 시 규모는 파악되지 않았다.
‘개성유고’에서는 왕석보 네 부자의 자연과 인간 삶에 대한 예찬과 함께 부패한 세상, 망국의 한탄을 엿볼 수 있다.
첫째 왕사각은 중년에 서울에서 3년간 머물며 과거시험을 준비했지만 어지러운 세상을 보고 구례와 광양에 걸쳐 있는 백운산으로 귀향했다. 글 외우는 재주가 뛰어났던 둘째 왕사천은 한때 순천에서 약방을 했으나 “장부가 백만금으로 크게 사업을 하지 못하고 여기에 얽매어 굶주린 범이 개미 잡아먹는 짓을 한단 말인가?”라고 말한 뒤 산천을 유람하고 선비들과 교류했다.
왕석보와 왕사각의 제자인 매천 황현(1855~1910)이 당시 3대 시인으로 꼽은 셋째 왕사찬은 서울에서 고관대작들의 시모임에 참석했다가 그들의 시를 살펴보곤 “내가 어찌 이런 무리와 수준을 다투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왕석보 일가 정신은 후대에도 전해져 왕수환은 황현 등과 1908년 사립학교인 호양학교 설립을 주도해 인재 육성에 나섰다. 1919년 구례 첫 만세시위에 나섰다가 고초를 겪고 세상을 떠난 박경현(1859∼1923)은 호양학교 1기 졸업생이고 왕석보의 증손자 왕재일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주모자로 지목돼 1년6개월을 복역했다.
구례향토문화연구회는 다음달 23∼24일 구례문화예술회관에서 ‘개성가고’ 번역·출간 기념 전국학술대회 열어 왕석보 일가를 중심으로 한 구례와 남도정신을 재조명할 예정이다.
박소동 교수는 “불운한 시대에 포부와 능력을 세상에 펼치지 못하고 지리산과 섬진강의 품 안에서 제자를 기르며 자연을 노래하는 것으로 불운한 감정을 삭이던 지식인들의 삶이 시편들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며 “이 시문집은 역사의 격동기를 살아간 당시 지방 지식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